오자와 지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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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자와 지사부로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1886년에 태어나 1966년에 사망했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 참모 등을 거쳐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남방 작전, 인도양 작전,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만 해전 등을 지휘했다. 특히 항공모함 운용 전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패배로 비판도 받았다. 종전 후에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했으며, 다발성 경화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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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지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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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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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자와 지사부로 (小沢 治三郎) |
별칭 | "도깨비 기와" (Onigawara) |
출생 | 1886년 10월 2일 |
출생지 | 고유군, 미야자키현, 일본 |
사망 | 1966년 11월 9일 |
사망지 | 일본 |
신장 | 183 센티미터 |
묘소 | 세타가야구, 다이키치사 |
복무 정보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909년 – 1945년 |
최종 계급 | 해군 중장 (대장 진급 거부) |
지휘 | 구축함 다케 구축함 시마카제 구축함 3호 제1 구축대 제4 구축대 제11 구축대 중순양함 마야 전함 하루나 제8 전대 해군 어뢰 학교 제1 항공모함 전대 제3 전대 해군대학교 제1 남방원정함대 제3함대 제1기동함대 해군 군령부 차장 연합함대 해상 호위 함대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말레이 작전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방위청 고문 |
2. 생애
오자와 지사부로는 1886년 미야자키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유도 실력이 뛰어났지만 폭력 사건으로 퇴학당하는 등 굴곡진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09년 일본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험상궂은 외모와 200cm에 가까운 큰 키에도 불구하고, 오자와는 부하들로부터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 그의 별명은 "가고일(괴물)"이었지만, 경험 많고 노련한 수상함대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부하들의 능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1910년 정식으로 해군 소위로 임관한 후, 태평양 전쟁 직전 제1항공전대 사령관으로서 기동부대 육성에 힘썼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였으며, 1919년에는 해군대학교 갑종 학생으로 입학하여 1921년 졸업하였다.
연도 | 내용 |
---|---|
1886년 | 미야자키현 고유군 다카나베정에서 출생 |
1906년 | 해군병학교 37기생으로 입학 |
1909년 | 해군병학교 졸업, 해군 소위 후보생 |
1910년 | 해군 소위 임관, 장갑 순양함 "카스가" 승선 |
1912년 | 포술학교 보통과, 수뢰학교 보통과 학생, 해군 중위, 구축함 "카스미" 승선 |
1913년 | 전함 "히에이" 승선 |
1915년 | 요코스카 해병단 부속, 해군 대위, 전함 "가와치" 분대장 |
1916년 |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
1917년 | 해군 수뢰학교 고등과 학생, 수뢰정 "가모메" 정장 |
1918년 | 수뢰정 "하쿠타카" 정장, 구축함 "히노키" 승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1919년 | 해군대학교 갑종 학생 |
1921년 | 해군대학교 졸업, 해군 소령, 구축함 "타케" 함장 |
1922년 | 마공 요항부 참모 |
1924년 | 구축함 "시마카제" 함장 겸무 |
1925년 | "제3호 구축함" 함장, 전함 "콩고" 수뢰장 |
1926년 | 연합함대 참모, 해군 중좌, 제1수뢰전대 참모 |
1927년 | 해군 수뢰학교 겸 해군 포술학교 교관 |
1929년 | 군령부 출사 |
1930년 | 구미 출장, 해군 대좌, 제1구축대 사령 |
1931년 | 제4구축대, 제11구축대 사령, 해군대학교 교관 |
1934년 | 중순양함 "마야" 함장 |
1935년 | 전함 "하루나" 함장 |
1936년 | 해군 소장, 해군대학교 교관 |
1937년 | 연합함대 참모장 겸 제1함대 참모장, 중일 전쟁 개시, 제8전대 사령관 |
1938년 | 수뢰학교장 |
1939년 | 제1항공전대 사령관 |
1940년 | 주간 뇌격 훈련 성공, 해군 중장, 제3전대 사령관 |
1941년 | 남견함대 사령장관, 말레이 작전 지휘 |
1942년 | 인도양 작전 참가, 군령부 출사 |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오자와 지사부로는 1886년 미야자키현 고유군 다카나베정에서 다카나베 번사 출신 아버지 오자와 도라타로와 어머니 야쓰 사이에서 태어났다.[12] 어린 시절 불량배와 싸워 유도 기술로 제압했지만, 이 일로 미야자키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13]실의에 빠져있던 중, 육군 군인이었던 형의 상관인 우시지마 사다오 대위로부터 격려 편지를 받고 해군에 지원했다. 1909년 해군병학교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이등순양함 소야에 탑승하여 훈련을 받았다. 이때 함장은 훗날 일본 수상이 되는 스즈키 간타로였고, 후보지도사관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였다.[18]
1910년 소위로 임관한 후, 아라레, 순양전함 히에이, 순양함 지토세 등 다양한 함선에서 복무했다. 1912년 포술학교 및 수뢰학교에서 수학하며 전문성을 키웠다.[15][16][17] 1917년 수뢰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같은 고향 출신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19]
1918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1년 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 펑후 제도의 마코 경비 지구 참모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이어갔다.[20]
연도 | 내용 |
---|---|
1886년 | 미야자키현 출생 |
1906년 | 해군병학교 입학 |
1909년 | 해군병학교 졸업, 소위 후보생으로 소야 탑승 |
1910년 | 해군 소위 임관 |
1912년 | 포술학교, 수뢰학교 수학 |
1917년 | 수뢰학교 고등과 졸업, 결혼 |
1918년 |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1921년 | 해군대학교 졸업, 해군 소령 임명, 구축함 타케 함장 |
1922년 | 마공 요항부 참모 |
2. 2. 군 경력 및 주요 활동
1926년 해군 중좌로 진급한 오자와는 제1수뢰전대 참모를 맡았다.[39] 1927년에는 해군 수뢰학교 및 포술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40] 1930년에는 구미(유럽과 미국) 출장을 통해 선진 군사 기술 및 전술을 연구했다.[41] 1931년 해군 대좌로 진급한 오자와는 구축대 사령을 역임했다.[42] 1934년에는 중순양함 마야 함장,[43] 1935년에는 전함 하루나 함장을 거치며 함선 지휘 경험을 쌓았다.[44]1936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한 오자와는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복귀했다.[45] 1937년에는 연합함대 참모장 겸 제1함대 참모장을 맡아 중일전쟁에 참전했다.[46] 1939년 제1항공전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항공모함 운용 전술 발전에 기여했다.[47] 1940년 해군 중장으로 진급한 오자와는 제3전대 사령관을 맡았다.[48] 1941년 해군대학교 교장을 거쳐[49] 남견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어[50]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의 남방 작전을 지휘했다.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 주력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51]
1942년 인도양 작전에 참가하여 벵골만에서 연합군 상선을 공격했다.[52] 같은 해 11월, 제3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어 항공모함 부대를 이끌었다.[53] 1944년 3월, 제1기동함대 사령장관을 겸임하며 마리아나 해전을 지휘했지만, 미 해군에 패배했다.[54] 같은 해 10월,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끼 부대를 이끌며 윌리엄 홀시 제독의 미 함대를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55] 일본 해군은 이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1945년 5월,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여 종전 시까지 일본 해군을 지휘했다.[56]
2. 3. 태평양 전쟁 참전
오자와 지사부로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남견함대 사령장관 시절,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레펄스를 격침시켜 영국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4] 당시 오자와는 기함 "초카이"에서 지휘했으며, 물에 빠진 영국 수병들을 구조하라고 명령하여 80% 이상의 영국 수병들이 목숨을 건졌다.1942년 11월 11일, 오자와는 나구모 주이치의 뒤를 이어 제3함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4년 3월 1일에는 제1기동함대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 오자와는 아웃 레인지 전법을 시도했으나, 일본 측의 항법 지원 미숙, 탑승원 숙련도 저하, 미군의 VT 신관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 작전에서 미숙한 조종사에게 어려운 전법을 시킨 문제가 지적된다.[58] 오자와 함대는 미 잠수함에 의해 항공모함 다이호, 쇼카쿠를 잃었고, 히요도 격침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61]
1944년 10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오자와는 미끼 부대인 제3함대를 이끌며 윌리엄 홀시 주니어의 미 함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으나, 일본 함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오자와는 기함 즈이가쿠가 작전 능력을 상실하자, 경순양함 오요도로 사령부를 옮겼다.[66]
1945년 5월, 오자와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여 종전 시까지 일본 해군을 지휘했다. 그는 해군 대장 진급을 거절했다.[75]
2. 4. 종전 이후 활동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자와 지사부로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자결을 만류했지만, 오니시 다키지로는 할복 자살했고, 우가키 마토메는 오키나와 바다로 자살 특공을 떠났다. 오자와는 오니시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혼자 지는 것을 한탄했고, 우가키에 대해서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인 것에 대해 격노했다고 한다.[84]전후 오자와는 세타가야의 자택에 칩거하며 조용히 지냈다. 1955년 9월 24일, 방위청 고문에 취임했다.[85] 1966년 11월 9일, 1941년부터 앓아온 다발성 경화증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하들을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장례식 때 쇼와 천황에게서 하사받은 제사료 7000JPY 외에 별도로 20000JPY이 부인으로부터 조회(전 해군 병사들의 모임)에 기부되었다.[86] 미국의 전쟁사 연구가 새뮤얼 모리슨은 "위대한 전략가이자 선원이었던 오자와 제독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라는 조사를 화환과 함께 보냈다.[87]
계명은 "대웅원전정예치도대거사"이며, 묘소는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다이키치사와 고향인 미야자키현 고유군 다카나베정에 있다.
2012년 8월 13일, 오자와의 유족 자택에서 그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소장기(少將旗)와 1942년 및 1944년에 쇼와 천황에게 군장을 상주했을 때의 상주문 초고가 발견되었다.[89] 사코노 尚敏는 "장기는 거의 현존하지 않으며, 극히 드물다. 또한 상주문은 당시 해군 상층부가 각각의 작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는 데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89]
3. 평가 및 논란
오자와 지사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그의 경력과 업적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및 논란이 공존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오자와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항공모함 운용 전술의 선구자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집중 운용을 주장하고 실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해상과 항공 양면에 걸친 병술가로 알려졌으며, 젊은 장교들의 신망을 받았다.[91] 부하들을 아끼고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체스터 니미츠 원수는 오자와에 대해 "패장이라고 해도 그에게 가능성이 인정되는 한 명장이다. 오자와 제독의 경우, 그 기록은 패배의 연속이지만, 그 패배 속에 무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라고 평가했다.[90] 나카자와 타스쿠 중장은 오자와가 명실공히 해상 지휘관으로서 해군의 제일인자였다고 평가했으며,[57] 치하야 마사타카 중좌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끼 기동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한 점 등을 들어 오자와를 높이 평가했다.[92]
그러나 오자와는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패배하여 이에 대한 책임론이 존재한다. 특히, 마리아나 해전에서 아웃 레인지 전법의 실패와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미끼 부대 운용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44년 12월, 오자와는 생물 무기를 사용하여 미국 민간인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의 계획인 Operation PX (밤의 벚꽃 작전)의 계획을 이끌었다.[6] 이 작전은 ''세이란'' 항공기가 미국의 서부 해안을 공격하여 흑사병, 콜레라 등 병원균을 살포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7]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오자와는 통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욕"이라고 생각했다.[93] 실전 지휘에 관해서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용단을 결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24] 그는 항공 전술을 가르쳐준 사람으로서 야마오카 미코오, 히바타 쿠리오, 키다 타츠히코를 꼽았다.[95]
전후 미국 장교들과의 인터뷰에서 오자와는 호감을 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노쇠하고 병약했지만, 침착하고 예리한 정신을 가졌으며 박식했다.[90]
3. 1. 긍정적 평가
오자와 지사부로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항공모함 운용 전술의 선구자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집중 운용을 주장하고 실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해상과 항공 양면에 걸친 병술가로 알려졌으며, 젊은 장교들의 신망을 받았다.[91] 부하들을 아끼고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는 평가도 있다.체스터 니미츠 원수는 오자와에 대해 "패장이라고 해도 그에게 가능성이 인정되는 한 명장이다. 오자와 제독의 경우, 그 기록은 패배의 연속이지만, 그 패배 속에 무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라고 평가했다.[90] 나카자와 타스쿠 중장은 오자와가 명실공히 해상 지휘관으로서 해군의 제일인자였다고 평가했다.[57]
연합 함대에서 오자와의 참모였던 치하야 마사타카 중좌는 마리아나 해전에서의 참패를 변호하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끼 기동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한 점과 종전 시 명령에 따르지 않는 부대가 있을 경우의 대책을 미리 준비시켰던 점을 들어 오자와 지사부로가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풍부한 뛰어난 연합 함대 사령 장관이었다고 평가했다.[92]
오자와는 통솔상 가장 중요한 것은 "무욕"이라고 생각했다.[93] 실전 지휘에 관해서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용단을 결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24] 나카자와 타스쿠 중장에 따르면, 오자와의 원거리 공격 전술 연구는 적보다 먼저 일격을 가하여 열세를 보충하고, 유리한 체제로 싸운다는 것이었다.[94]
오자와는 항공 전술을 가르쳐준 사람으로서 야마오카 미코오, 히바타 쿠리오, 키다 타츠히코를 꼽았다.[95] 그러나 "비행기를 탄환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오자와의 발언은 그의 전술 사상이 항공기의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 아니라, 오자와의 전공 분야인 수뢰전 그 자체였다는 지적도 있다.[96]
3. 2. 부정적 평가 및 논란
오자와 지사부로는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패배하여 이에 대한 책임론이 존재한다. 특히, 마리아나 해전에서 아웃 레인지 전법의 실패와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미끼 부대 운용에 대한 비판이 있다.[44]마리아나 해전에서 오자와는 아웃 레인지 전법을 채용했지만, 일본 측의 항법 지원 미숙, 탑승원 숙련도 저하, 미군의 요격기나 VT 신관에 의한 요격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 작전에서 조종사 훈련을 타위타위에서 중단시킨 것이 숙련도 저하로 이어졌고, 미숙한 기량의 조종사에게 어려운 전법을 시킨 문제가 지적된다.[58] 오자와는 항공모함 다이호 피해 직후 제2함대 사령관 구리타 다케오에게 지휘 계승 전보를 보내지 않은 것을 일생의 불찰이라고 회상했다.[24]
레이테 만 해전에서 오자와의 제3함대는 미끼 부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통신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함 즈이가쿠는 일찍이 작전 능력을 상실했고, 기함 설비가 갖춰진 경순양함 오요도로 사령부를 이송해야 했다. 오요도의 전투 상세 보고서에는 연합 함대 사령부의 지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 정규 항공모함 군에 대한 견제, 유치에 노력해야 할 시기와 기간에 대한 관념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오자와의 지휘에 대한 비판도 있다.[66]
지휘하의 제2항공전대 참모였던 오쿠미야 마사타케는 미 항공모함을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해전에서) 크고 작은 항공모함 7척이 격침된 책임의 대부분은 오자와에게 있다고 하였다.[44] 또한 패배 후에도 오자와 사령부의 고급 참모가 "승패는 때의 운"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63]
일부에서는 오자와가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항공 참모 다나카 마사오미는 오자와는 스스로 결정하고 막료에게 세부 사항을 계획하게 하는 지휘관 선두형으로 실전형이라는 의미에서는 만점에 가깝지만, 비행기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함장이 가지고 있는 정도의 지식으로 훈련이나 성능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고 평가했다.[49]
3. 3. 기타
오자와는 부하들 사이에서 '해군에서 가장 못생긴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험상궂은 외모 때문에 "가고일(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1] 하지만 그는 경험 많고 노련한 수상함대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부하들로부터 최상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재주가 있어 존경을 받았다.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 군령부 차장이었던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2천만 명의 일본인 생명을 더 희생하면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오자와는 "2천만 명이 더 죽으면 누가 일본을 재건할 것이냐"고 질책했다고 한다.[11]
전후 그를 인터뷰한 미국 장교들에 따르면, 오자와는 호감을 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당시 노쇠하고 병약했지만, 침착하고 예리한 정신을 가졌으며 박식했다. 역사가들은 오자와와의 전후 심문을 통해 레이테만 전투 직전에 발생한 쇼고 계획의 중요한 변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90] 그는 또한 부하들에게 용감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 체스터 니미츠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오자와에 대해 "승리한 지휘관은 명장이고, 패배한 지휘관은 어리석은 장군이라는 것은 저널리즘의 평가에 불과하다. 지휘관의 성과는 오히려 그가 가진 가능성에 있다. 패장이라고 해도 그에게 가능성이 인정되는 한 명장이다. 오자와 제독의 경우, 그 기록은 패배의 연속이지만, 그 패배 속에 무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아마 부하들은 그 밑에서 일하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라고 평했지만, 미측 기록에는 없다.[90]
- 나카자와 타스쿠 중장에 따르면 오자와는 명실공히 해상 지휘관으로서 해군의 제일인자였다고 한다.[57]
- 겐다 미노루 대좌에 따르면 "오자와 중장은 수뢰 전술의 권위자였고, 1940년 이후에는 항공 부대의 지휘관도 맡아 해상과 항공 양면에 걸친 병술가로 알려졌으며, 젊은 장교들의 여망을 받았다"고 한다.[91]
- 연합 함대에서 오자와의 참모였던 치하야 마사타카 중좌는 마리아나 해전에서의 참패에 대해 "작전 계획 및 지도가 부적절했던 것이 그러한 참패를 초래한 한 원인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주된 원인은 1942년부터 이듬해 1943년에 걸쳐 일본 해군이 그 함정, 비행기를 솔로몬 방면의 사투에서 잃고,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날마다 세력을 늘린 적 측에 마셜 제도, 트럭 섬으로 몰려, 그 병력 재건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데에 있었다"고 옹호하며, 그 후 레이테만 전투에서 미끼 기동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한 점과 종전 시 명령에 따르지 않는 부대가 있을 경우의 대책을 미리 준비시켰던 점을 들어 "오자와 지사부로는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풍부한 뛰어난 연합 함대 사령 장관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연합 함대 사령 장관) 4명 중에서는 오자와 지사부로가 연합 함대 사령 장관으로서는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9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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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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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攻」とは何だったのか森史朗×保阪正康 『特攻とは何か』 (森史朗 著) {{!}} 「本の話」編集部 {{!}} インタビュー・対談
https://books.bu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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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合艦隊作戦室から見た太平洋戦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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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兵を救助せ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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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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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航空隊始末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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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海軍 失敗の本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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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19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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